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도서 리뷰] 문화혁명의 진실을 읽어보았습니다.

문화혁명의 진실을 읽어보고 리뷰를 진행합니다.

[도서 리뷰] 문화혁명의 진실을 읽어보았습니다.

일단 후퇴했던 모택동

1966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일선으로 복귀한다. 그리고 공산당 내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실로 충격적인 슬로건, “사령부를 포격하라”를 대자보로 써 붙인다. 모택동의 선동과 격려에 따라 수많은 학생 홍위병이 궐기하여 전국 곳곳에서 당 간부들을 끌어내 가혹한 비판과 체벌을 가하기 시작한다. 20세기 정치사에서 가장 기이한 사건, 중국의 문화혁명이 개시된 것이다. 문화혁명은 워낙 유명해서 중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꽤 익숙하다. 인민의 삶에 미친 영향으로 따지자면 사실 대약진운동이 훨씬 심각한 사건이었지만, 대약진운동보다는 문화혁명이 더 유명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혁명은 모택동과 극좌 모택동주의자들(임표와 “4인방” 등)이 대약진운동 후 상실한 공산당의 실권을 되찾기 위해 무지하고 어린 학생들을 선동해 반대파를 내쫓고 많은 성실한 당 간부들과 지식인들을 억압한 사건, 그래서 그 결과 중국 전체를 대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결국엔 대다수 인민에게 큰 피해를 끼쳤던 사건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문화혁명을 당 고위층 간의 권력투쟁이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또한, 오늘의 중국공산당이 문화혁명에 대해 내리는 지배적 해석이기도 하다. 또, 문화혁명은 흔히 “10년 대동란”이라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1966년부터 모택동이 사망한 1976년까지 10년 동안 계속된 운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해석은 물론 상당 부분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란 단지 일면적인 사실일 뿐이어서 총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마이스너의 책에서 가장 많이 배운 부분이 바로 문화혁명에 관한 내용이다. 마이스너는 문화혁명의 역사를 총괄적으로 정리하여 그야말로 총체적인 진실에 접근한다. 우선, 마이스너가 보여주는 문화혁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몇 가지 정리해 보자.

첫째는 문화혁명의 대결구도

극좌 모택동파(와 홍위병) 대 나머지 대다수 간부, 지식인, 인민이라는 식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문화혁명에서는 각 지역마다 둘, 셋, 넷 등 여러 파벌이 형성되어 서로 싸움을 벌였는데, 그들은 모두 모택동파를 자처했다. 이들 중에서는 기존 당 간부들을 공격한 “조반파”(造反派)와 기존 당 간부들 편에 가까운 “보황파”(保皇派)가 전형적인 파벌이었지만, 반드시 이런 이분법이 성립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어에서 "조반"이란 반란이나 모반과 비슷한 뜻을 갖는다.) 더 중요한 것은 조반파에 가장 열성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이제까지 우파라 하여 억압당해 온,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반 노동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조반파에 참여하여 기존 당 간부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니까 철없는 학생들이나 극소수 극좌파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공화국의 많은 일반 시민들도 모택동의 선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둘째, 문화혁명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각각 누구인지가 분명치 않았다

흔히 알려져 있는 사실은 많은 성실한 당 간부들과 지식인들이 죽고 투옥되고 노동수용소에 보내지고 길거리에서 조롱당하며 극렬한 박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모택동의 선동에 호응해 열렬히 참여하여 당 간부들과 지식인들을 박해했던 가해자, 즉 수많은 노동자들, 일반 시민들이 나중에 훨씬 더 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초기에 가장 극렬하게 지식인들이나 과거의 "우파 분자들"을 박해했던 것은 노동자 조반파가 아니라 오히려 보황파에 가까운 일부 학생 홍위병(이들은 대개 당 간부의 자제들이었다)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모택동과 모택동주의자들은 문화혁명의 불을 당기긴 했지만, 그 후의 사태 전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상황은 모택동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공산당과 국가통치체제의 근간을 위협하는 수준, 그냥 방관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내란으로 번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으로 발전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해 모택동은 결국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된다. 먼저 학생 홍위병에게는 해산하여 농촌으로 하방할 것을 명령한다. 학생 홍위병은 많은 경우에 당원들이나 비교적 상위계층 노동자들의 자식들이었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하지만 일반 노동자 조반파를 통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홍위병"은 대개 학생들을 가리킨다. 일반 노동자에게는 "홍위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모택동은 군대(“인민해방군”)를 투입하여 질서를 회복할 것을 명령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군대도 반드시 전적으로 모택동의 통제 아래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군대의 장군들은 그들 자신이 공산당 간부들이었고, 문화혁명에서 공격당한 당내 실권파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들은 중국 곳곳에서 노동자 조반파를 가혹하게 진압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살해당하거나 투옥되었다. 즉 흔히 피해자라고 알고 있는 당 간부들이나 지식인들은 박해를 당하긴 했으나 죽임까지 당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반면에, 애초의 가해자였던 노동자 조반파 중에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수십만 명에 달한다는 것이 통설이라고 한다. 이처럼 학생 홍위병이 농촌으로 하방당하고 노동자 조반파가 군대를 통해 진압당한 것은 1967년 가을에서 1968년 겨울 사이다. 그러니까 진짜 중요한 의미의 문화혁명은 길어야 2-3년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던 셈이다. 1969년 봄이 되자 중국은 거의 질서를 회복했고 박해를 받았던 당 간부들은 순차적으로 제 자리로 복귀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은 유소기와 함께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의 핵심으로 공격당했던 등소평이 모택동의 부름을 받아 1974년 초에 다시 최고위급 지도자(부주석, 부총리 겸 군총참모장)로 복귀한 사실이다(유소기는 1969년에 옥중에서 사망했다). 결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한 문화혁명은 공산당의 부활로 막을 내렸고, 모택동이 당초에 격려했던 유토피아적 공산주의의 이상은 환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문화혁명의 기이한 사태 전개

모택동 사상과 정치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택동은 공산당 관료가 새로운 계급으로 자리를 잡는 것을 비판하고 본래적인 공산주의적 이상을 열정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무질서, 무정부주의에는 더욱 단호하게 반대하고, 공산당 통치체제를 굳건히 수호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모순은 사실 중국 사회주의 자체의 현실적 모순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택동은 공산당 내의 “부르주아적 요소”만을 솎아내려 했지만, 모택동의 선동에 호응한 많은 시민들, 노동자들은 공산당의 관료주의, 공산당의 지배체제 그 자체에 대해 저항하였다. 학생 홍위병과 노동자 조반파의 열렬한 참여, 모택동조차 예상치 못하고 통제하지 못했던 그런 열정은 사실은 공산당 지배체제 아래에서 쌓이고 쌓였던 갈등과 불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많은 우파들은 좌파들을 공격할 때 즐겨 문화혁명과 홍위병의 사례를 인용하며, 마치 홍위병이 좌파의 상징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중국의 급진파 홍위병이나 노동자 조반파는 공산당 지배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이다. 반공주의자인 한국의 우파들이 공산당을 공격한 급진파를 비난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또 달리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의 우파나 중국의 공산당이나 기존의 국가질서를 견고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같은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문화혁명의 거대한 물결이 지나가고 난 후인 1970년대 초중반은 어찌 보면 평온한 반성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극좌 모택동주의자들인 “4인방”(강청,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이 계속해서 요란한 정치선전을 계속했지만, 대다수 당 간부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도 이제는 무질서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당에 저항하고 간부들을 박해했던 많은 사람들도 이른바 혁명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당 간부들도 이제까지 자신들이 중국을 통치해온 방식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모택동의 권위도 그의 건강상태와 함께 서서히 하강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문화혁명 초기에 모택동의 후계자로 추앙받았던 군부의 실권자 임표(린뱌오)가 1971년 쿠데타를 시도하다 탄로가 나 도망 길에 사망한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모택동은 신이 아니었다. 문화혁명 중에 그의 통치능력은 심각하게 흔들렸고 후계체제를 확립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1976년 1월, “모택동의 충실한 전우이자 영원한 총리”인 주은래(저우언라이)가 사망하고, 이어서 9월에 모택동이 사망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국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혁명이 아닌, 다른 방식의 변화여야 한다는 것은 명백해 보였다. 문화혁명에 대한 반성이 널리 퍼졌다고 해서 문화혁명이 전혀 긍정적 측면이 없는 “10년 대재난”이었다는 식의 해석이 타당한 것은 아니다. 문화혁명은 공산당 관료들에 의한 지배체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당 간부들은 더 이상 옛날과 같은 방식으로 민중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로서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일반 민중들도 더 이상 관료들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수동적 백성이 아니게 되었다. 일반 민중이 훨씬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문화혁명 중의 갖가지 혼란과 악행에 대해 반성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는 것은 거대한 역사적 진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혁명은 정치적, 사상적인 면에서 보면, 그 다음 단계인 개혁, 개방의 준비작업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문화혁명을 통해 공산당 지배체제가 상대화되고 이념이 상대화됨으로써, 비로소 기존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벗어나는 새로운 역사적 실험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개혁, 개방의 정치학

그야말로 격렬하고 극좌적이며 유토피아적인 구호가 난무하던 문화혁명 초기의 중국을 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과 10여년 후에 개혁, 개방을 통해 자본주의의 길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개혁, 개방이 시작된 후인 1980년대 초중반까지도 중국이 가는 길이 자본주의라는 것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모택동은 중국이 자본주의로 갈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였다. 그가 말한, “공산당 내에서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라는 표현은 사실은 정확한 것이었다. 유소기는 박해를 받아 죽었으나, 그 다음으로 중요한 지도자인 등소평이 실제로 자본주의의 길로 중국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리고 등소평뿐만 아니라, 대다수 당 간부들이 그런 방향을 지지했고 그 과정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 마이스너는 중국이 자본주의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길에 수반되어 나타난 여러 가지 부정적 측면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마이스너 자신의 사상이 사회주의(현실의 체제로 존재했던 사회주의가 아니라 이념상의 사회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마이스너는 중국 사회주의에 대해 적용했던 비판적 분석시각, 즉 사회 내의 여러 계급, 계층, 집단 간의 모순과 갈등이라는 시각을 개혁, 개방 이후의 중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공산당이라는 거대 관료집단이 지배하는 현실을 목격한다. 그러니까 과거의 사회주의가 관료 사회주의였다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관료 자본주의다.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후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공산당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통치방식을 바꾸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마이스너는 그 과정에서 대단한 경제성장이라는 성과가 나타났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런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모택동 시대에 닦은 경제적, 사회적 기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마이스너의 설명에서는 뭔가 자본주의의 성과를 평가절하하고 싶어 하는 감정이 느껴진다. 마이스너와 달리, 나는 중국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산당 통치체제의 유지라는 외형적 모습보다는 공산당 자체의 성격 변화라는 내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과거의 공산당도 공산당이고 오늘의 공산당도 공산당이며, 이들은 모두 관료고, 관료주의자들이다, 그러니까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관료가 지배하는 나라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태의 일면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이라는 명패는 걸고 있지만, 과거 국가 사회주의 시절의 공산당이 갖는 본질적 특징들은 대체로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오늘의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흔히 존재하는 독재체제의 특수한 유형일 뿐이다. 중국 공산당이 개혁과 개방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그들이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성격 자체를 재창조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의 개혁과 개방이 공산당이 기획한 대로, 공산당이 원하는 대로 진행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식 경제체제가 가했던 굴레들을 조금씩 벗겨나가기 시작하자, 자생적인 힘이 곧바로 분출되어 나왔다. 초기의 개혁, 개방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끌어간 농촌 개혁 운동이었다. 집단농장이 해체되고 가족농 제도가 정착된 것, 농민들이 “향진기업”(향과 진은 중국의 농촌 행정단위이고, 향진기업이란 농민들이 만든 기업이라는 뜻이다)을 만들어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진출한 것, 모두 농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물론 그런 자발적 운동을 할 수 있게 과거와 다른 정치적, 사상적 분위기를 만든 것은 등소평 같은 지도자들의 공이다. 이런 다른 분위기 속에서 공산당 간부들도 서서히 개혁과 개방에 참여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도시경제에서도 시장경제가 도입되어 자본주의 경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공산당 간부들이 이득을 보았고 새로운 자본가, 사업가로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과 상관없는 많은 일반 시민들 중에서도 자본가, 사업가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경제활동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관료적 통제에서 벗어났고, 그런 부문이 가장 활력 있게 성장하는 부문이 되었다. 요컨대 관료 자본주의란 개혁, 개방 이후 중국 자본주의의 부분적 특징일 뿐이다. 관료라는 수식어가 대변하는 특수성보다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본질적 속성 자체가 더 중요하다. 중국식 개혁, 개방의 묘미는 그것이 경제성장의 과정일 뿐 아니라, 고도로 잘 조율된 정치적 타협의 과정이었다는 데 있다. 중국 공산당은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면서 무엇보다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중시했다. 그러다 보니 당이 주도하는 급진적 개혁보다는 인민의 자생적 움직임을 추종하는 수동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이 중심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계급, 계층 간, 집단 간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애를 썼다. 기존 기득권 집단인 당원들과 도시 주민들의 이익을 보호하면서도 농민이나 새로운 사업가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이를 가리켜 경제학계에서는 “패자 없는 개혁”(reform without losers)라고 부른다. 개혁, 개방 과정에서 누구는 돈을 많이 벌고 누구는 적게 벌었다는 차이는 나타났다. 하지만 개혁, 개방 이전에 비해 처지가 불리해진 집단은 없다. 개혁, 개방의 전 과정을 보면, 종전부터 일종의 특권층이었던 도시 주민들이 더 큰 이득을 보았다. 하지만 대다수 농민도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고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중국의 개혁, 개방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빈곤 퇴치”(poverty reduction)의 과정이었다. 물론 마이스너가 지적하는 중국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도 충분히 주목을 해야 할 것이다. 어두운 면을 분석하여야 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길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자본가 대 노동자의 대립이라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자본주의 분석을 중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중국 사회를 온전히 이해하는 길은 아닐 것 같다. 오늘의 중국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방식은 19세기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영국 자본주의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중국 자본주의가 앞으로 발전해가는 방식에서도 과거 서방 자본주의의 그것과 다른 면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 나타나는 방식도 역시 다르다. 중국의 어두운 면은 앞에서도 언급한 호구제도와 가장 관련이 깊다. 도시 주민과 농민의 구조적 차별이라는, 중국의 독특한 제도적 특성에 대해서는 마이스너의 책에 등장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있고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중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찾는 것도 역시 이 문제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이스너의 책은 중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중국 현대사를 다룬 다른 책들은 흔히 최고위 지도자들의 생각과 행동, 그들 간의 싸움 등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마이스너의 책은 사회의 근본적 구조와 거기서 파생하는 모순과 갈등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러한 모순과 갈등이 지도자들과 일반 인민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한 근본적 동력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역사를 이해할 때도 유념해야 할 가장 중요한 통찰력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