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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농촌과 도시 간 모순과 불평등

오늘은 농촌과 도시 간 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리뷰를 진행해보겠습니다.

[도서 리뷰] 농촌과 도시 간 모순과 불평등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의 역사

핵심 포인트는 농촌과 도시 간의 모순과 불평등이다. 마이스너는 이 책에서 이를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방금까지 이야기한 정치, 사상투쟁의 역사에 비하면, 도농 간 불평등에 대한 설명은 너무 간략해서 독자의 주목을 충분히 끌지 못하는 것 같다. 농촌과 도시 간의 불평등은 사회주의 체제 수립 당시부터 시작하여 자본주의로의 길을 걷고 있는 오늘까지 중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점에 대해 마이스너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추가적 설명을 조금 더 덧붙이고 싶다. 마이스너는 먼저 흔히 "사회주의적 원시 축적"(primitive socialist accumulation)이라 불리는 사회주의적 공업화 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전략은 1930년대 소련에서 추진되었던 것인데, 중국은 이를 1950년대에 모방했다. 근대화의 요체는 공업화다. 그런데 공업화를 이루려면 공업부문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다. 그럼 투자자금은 어디서 마련되어야 하나? 1930년대의 소련이나 1950년대의 중국 모두 공업부문은 미약했고 주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투자자금 마련을 위한 저축은 주로 농민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농업부문을 자작농 체제로 유지한다면..

농민 저축을 통한 급속한 공업화는 어렵다

농민에게서 공업화에 필요한 투자자금을 짜내려면 무거운 세금을 매기거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농산물 가격을 억제하고 상대적으로 (국유 공업부문이 생산하는) 공산품 가격을 높여 농산물-공산품의 교환 과정에서 농민이 손해를 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농민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며, 농민들은 생산한 농산물을 도시와 공업을 위해 내놓는 대신 스스로 소비하는 데 써버리게 된다. 소련에서 스탈린이 강제로 농업 집단화를 추진한 것은 이런 자작농의 자주적 경영권한을 말살하고 농산물에 대한 처리 권한을 국가가 직접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도 이런 필요성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곧바로 토지개혁을 실시해 지주계급의 땅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농업 집단화를 실시해 집단농장 체제를 만들었다. 이처럼 사회주의적 원시축적이란 농업부문의 희생을 통한 급속한 공업화를 의미하는데, 그 경우 당연히 농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며, 상대적으로 대우와 생활이 나은 도시로 이주하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러나 현대적 공업기반을 단시일 내에 구축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상대적으로 사람을 적게 쓰는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추진했으므로, 도시의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이런 모순에 직면하여 중국 공산당은 1950년대 중후반에 농민의 도시 이주를 엄격히 규제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 기본적 틀이 남아 있는 호구제도(戶口制度)가 바로 그것이다.

마이스너의 책에서는 이 호구제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다

하지만 대다수 중국인들, 특히 농민들에게 호구제도는 그야말로 그들의 삶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사회제도다. 사회주의 시대 중국의 양대 사회제도를 공공소유제도와 호구제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개혁, 개방 이후 공공소유제도와 호구제도는 둘 다 큰 변화를 겪게 되지만, 상대적으로 덜 변한 것이 호구제도라고 할 수 있다. 공공소유제도는 기본적으로 폐지되어 가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고 사유재산제도가 기본적 사회제도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호구제도의 기본적 틀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호구라는 말은 우리 식으로는 호적이나 주민등록과 비슷한 말이다. 하지만 호구제도란 단순한 주민등록제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한, 또는 심각하게 제한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호구는 기본적으로 농민과 비농민이라는 신분상의 구별과 농촌과 도시(도시 중에서는 다시 대도시, 1급도시, 2급 도시 등으로 등급이 나뉜다)라는 지역상의 구별이라는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그 경우 기본적으로 도시의 비농민 호구가 좋은 것이고 농촌의 농민 호구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도시의 비농민에게는 국가가 책임지고 직업과 사회보장을 제공하지만, 농촌의 농민은 자신이 소속한 집단농장 단위별로 각자 알아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의 정부, 행정기관과 국유기업에 종사하는 간부와 노동자는 중국에서 일종의 특권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시대의 경우 규정된 호구에 따라, 규정된 지역에서 규정된 신분에 따라 살아야만 했으며, 호구의 변경을 허락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호구제도는 세습제도다. 부모가 농촌에 사는 농민이라면 자식도 역시 농촌의 농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호구제도는 개혁, 개방 이후에는 부분적으로 완화되었다

농촌의 농민도 도시에 일자리가 있으면 도시에 가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개혁, 개방 후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호구의 변경은 일반적으로 허락되지 않으므로, 도시주민에게 제공되는 사회보장을 받을 수 없다. 공공주택을 분배받거나 민영주택을 구매하기도 어렵고(오늘날엔 주택 상품화가 많이 이루어져 민간주택시장이 형성되었으나, 농촌 출신은 주택 구매에 필요한 “주택 공적금” 제도의 대상이 못되므로, 도시의 상품주택을 구매하기가 매우 어렵다), 의료보험 대상이 안 되며, 자식을 도시의 학교에 보낼 수도 없다. 따라서 농촌 출신 이주 노동자는 미혼 청년이거나 가족이 있더라도 단신으로 도시에 거주하거나, 또는 자식들이 어릴 때에만 거주하다가 결국 농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또 도시에 체류하려면 해당 도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허가를 받지 않고 거주하면 불법체류자로서 언제든지 처벌받고 추방당할 위험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시대에 형성된 도시주민과 농민 간의 구조적, 제도적 차별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중국 정부는 호구제도의 개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어서 장기적으로는 차별이 점차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다수 농민들에게 제도적 차별의 장벽은 아직도 매우 높다.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하는 제도는 중국뿐 아니라 소련이나 북한 같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했다. 또한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도시 주민이 농민보다 우대를 받았다. 하지만 중국은 농민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도시 주민과 농민 간의 차별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심했던 것 같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초 농촌 출신이 많았고 농민 출신 홍 군에 의지해 혁명에 성공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면서 도시 주민을 특권층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사실, 개혁, 개방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이 통치체제를 확실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도시 주민의 지지기반이 매우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정치, 사상투쟁의 특수성 못지않게, 이 점도 중국 정치와 사회의 특수성을 규정한 핵심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대약진 운동의 비극

이제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 첫 번째는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인 대약진 운동이다. 당시의 통계가 제대로 작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확실한 숫자를 알 수는 없지만, 1950년대 말 대약진 운동의 시기에 중국에서는 적어도 1,500만 명에서 많게는 3,000만 명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발생한 대기근의 심각성은 1990년대 중후반 북한에서 발생한 대기근의 경우와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두 기근 모두 총인구의 3~5%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대기근에 대해서는 300만 아사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보다 면밀한 연구에 의하면, 60만~100만 명 정도의 초과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 세계의 총사망자 수 또는 중일전쟁으로 인한 중국 측 사망자수와 맞먹거나 또는 그보다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대약진 운동이란 무엇이었나, 그리고 왜 그렇게 엄청난 비극을 낳았나? 대약진 운동이 어떤 운동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마이스너의 이 책이 훌륭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대약진 운동은 한편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농업 집단화의 물결을 극단으로 더 끌고 간 운동이었다. 그러니까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약진 운동은 소비에트식 경제체제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1950년대에 중국은 소련의 경우를 모방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소비에트형 공업화를 추진했고, 그 결과 1950년대 후반 중국 경제는 기본적으로 소련을 모방한 소비에트형 경제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 의식을 갖고 있던 모택동은 1차 5개년 계획 이후 수립된 중국 경제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소비에트식 경제가 아닌 본래적인 공산주의적 이상, 즉 “코뮌”의 모델을 내세웠고, 도시와 농촌의 결합, 공업과 농업의 결합, 교육과 생산의 결합 등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고 싶어 했다. 모택동의 추종자들은 지방을 돌아다니며 이런 공산주의적 열정을 선전했고, 이에 호응해 중국 전역에서는 그동안 형성된 집단농장의 규모를 대폭 확대한, “인민공사”(people's commune)라는 이름의 대규모 농촌공동체가 속속 수립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인민공사”야말로 공산주의의 이상향으로 나가는 길을 더욱 앞당길 수 있는, 그야말로 기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과 1~2년 사이에 “인민공사” 단위의 경제활동은 당초의 기대와 완전히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농업생산이 대폭 감소하여 대기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대규모 농촌공동체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을까? 나중에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되지만, 무엇보다 집단농장은 효율적인 농업생산조직이 아니었고, 가족 노동력에 기초한 소농 체제보다 열등했다. 특히 인민공사 같은 대규모 조직은 더욱더 비효율적으로 작동했다. 게다가 그야말로 무지에 기초한 엉터리 정책들과 이상기후로 인한 자연재해도 한몫을 했다. 특히, 공업의 기초원료인 철강을 대대적으로 증산하기 위한 “뒷마당 제철소” 운동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전혀 쓸 수 없는, 불량한 품질의 철강이 대량 생산되었으며, 철강 생산을 위해 농기구 같은 긴요한 제품들을 용광로 속에 마구 집어넣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것은 대약진운동이 한편으로는 소비에트식 경제체제에 대한 대안을 만들려고 했으면서도, 이와 동시에 급속한 공업화라는 소비에트식 노선을 매우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병행 추진했기 때문이다. 또, 핵심 노동력인 남성들은 대규모 관개시설 건설을 위해 동원되어 정작 농사일을 할 인력이 크게 부족해졌다. 관개시설은 장기적으로 쓸모 있는 것이었지만, 당장의 농산물 수확은 크게 감소하였다. 비극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상부의 압력을 두려워하고 공산주의적 열정을 과장했던 농촌 하급간부들의 허위 과장 보고였다. 그 결과 식량 생산량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도시로의 공출 물량이 오히려 늘어났고, 줄어든 식량을 공출로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가 분명해지면서 2~3년 만에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인민공사는 폐지되어 종전의 소규모 집단농장 체제가 부활되었다. 한 동안은 자류지(개인텃밭), 자유시장, 농가별 청부제 등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는 1970년대 말 개혁, 개방 당시의 농업개혁과 유사한 조치이다. 그러니까, 개혁, 개방은 대약진운동 직후의 농업정책을 다시 실시한 데서 시작되었다.) 동시에 앞에서 언급한 도시와 농촌 간의 차별과 분리 정책이 확고해졌고, 도시 중심의 공업화 노선을 재추진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모택동이 이선으로 후퇴하고 유소기(류샤오치), 등소평(덩샤오핑) 등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결국 대약진운동은 유토피아적 공산주의 운동이 퇴조하고 다시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체제가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농촌과 도시 간 모순과 불평등에 대한 리뷰를 마칩니다.